나눔과 변화 이야기

시니어 사회공헌활동 수기 공모전 최우수상 - 유장근 회원 '가치있는 삶'

2015.03.10

저는 LG그룹에서 30년간 근무하다가 2009년 말에 55세의 나이로 퇴직했습니다. 벌써 만 5년이 지났습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퇴직 후 처음 몇 달간은 자유로움을 만끽합니다. 그러나 그 시기가 지나면 할 일이 없는 무료함과 허탈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퇴직 후의 삶은 그 무료함과 허탈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달려 있고 그에 따라 제2 인생의 삶의 가치가 달라진다고 봅니다.

 

제 퇴직 후 초기의 생활과 생각을 정리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사람은 바로 제 아내였습니다. 퇴직 후 아내에게 “나, 퇴직했어요”라고 얘기했을 때 아내는 제 우려와는 다르게 그 사실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주었을 뿐만 아니라 제가 충격이나 부담을 느낄까봐 오히려 저를 위로하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그런 아내의 보살핌 덕분에 저는 너무 일찍 직장을 그만두었다는 부담감보다는 오히려 그래도 누구 못지않게 훌륭하게 직장생활을 마쳤다는 뿌듯함으로 과거를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의 그런 정리가 지금의 다양한 제 활동을 마련하는 토대가 되었다고 여겨집니다.

 

퇴직 후 무료하게 지내고 있던 어느 날 아내는 제게 부부여행을 제안했습니다. 아내에게 늘 고마운 심정을 품고 있던 저는 기꺼이 동의했고 그렇게 우리 부부는 2011년 초봄에 해외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그 여행은 일반적인 패키지여행과는 사뭇 다른 ‘스페인 산티아고 걷기 여행’이었습니다. 아내와 둘이 장장 800Km의 길을 33일간이나 걷는 여행이었습니다. 여행의 과정은 여행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수행이나 고행에 가까운 육체적으로는 아주 고달픈 여정이었습니다. 그러나 부부 둘이만 갔던 그 여행이 제게는 아내와의 사랑의 깊이를 더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고, 먼 길을 걷는 중 깊은 사색을 하며 앞으로의 제 삶의 방향을 정리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여행을 마치고 저는 그 여행의 의미가 너무나 감동적이어서 기록으로 남기고자 글을 쓰기 시작했고 그 원고가 출판사에서 채택되어 책으로 출판을 하게까지 되었습니다. 그 책은 ‘산티아고 길의 소울메이트’라는 제목으로 지금도 시중에 판매되고 있습니다. 이 성공적인 책 출간으로 저는 직장생활을 할 때는 감히 상상하지도 못했던 일을 해냈다는 뿌듯함을 느끼기에 충분했고, 앞으로의 삶이 꼭 익숙한 직장생활이 아니더라도 다른 활동을 통해 얼마든지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갖는 데도 큰 도움을 얻었습니다. 저는 곧바로 새로운 삶의 길들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선택한 새로운 길은 봉사였습니다. 아내의 권유도 있었지만 저도 봉사야말로 지금 제가 살아 있다는 감사한 사실에 대한 적극적인 보답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봉사는 ‘서울성모병원’ 호스피스병동에 입원해 있는 말기암 환자를 돌보는 일로 시작했습니다. 일주일에 하루, 거동이 불편한 환자들을 도와 몸을 씻겨주기도 하고 대화도 하면서 생명을 다할 때까지 환자가 편안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활동을 하는 것입니다. 환자와 그 가족들로부터 “천사가 따로 없네요. 정말 감사합니다”라는 인사를 들을 때 말할 수 없이 뿌듯한 보람을 느끼며 인생은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라고 확인하게 됩니다.

한편으로는 다양한 분들의 죽음을 대하면서 어떤 삶을 사는 것이 제대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인지를 생각하게 되며 가끔은 거기서 깨달음을 얻기도 합니다. 이 봉사를 시작한 지 이제 3년이 지났고, 앞으로도 계속할 것입니다.

 

또 다른 새로운 삶의 길로 도슨트 활동도 찾았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서울노인복지센터’에서 ‘도슨트 양성교육’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도슨트는 미술관에 전시된 작품을 관람객들에게 해설해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그 일이 저와 잘 어울릴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일이 제게는 전혀 생소한 분야인 미술을 새롭게 공부할 수 있는 도전의 기회가 되기도 하면서 제가 직장생활을 하면서 익힌 발표역량을 여러 사람 앞에서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해당 교육을 수료했고, 마침 ‘서울대학교미술관’에서 도슨트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즉시 신청하여 도슨트로 선발되었습니다. 2014년 4월부터 지금까지 세 차례의 기획전에서 활동 했는데, 관장님으로부터 다른 젊은 도슨트들의 모범이 된다는 칭찬을 듣기도 하면서 정말 신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활동을 하면서 ‘새로운 것을 안다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이냐’고 한 ‘논어’의 말씀을 새삼 깨닫고 있습니다.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에는 제가 가까이 할 기회가 있으리라고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미술, 그것도 난해하기 그지없다는 현대 미술을 하나하나 이해하게 되면서 얻게 된 깨달음입니다.

 

저는 금년에 ‘서울시립미술관’ 도슨트가 되는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후 몇 년 더 도슨트 활동을 한 후 이 분야에서 전문성을 갖추게 되면 관련 내용으로 책을 출간할 생각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꿈을 구체화시키기 위한 일환으로 작년 말에는 ‘서울인생이모작지원센터’에서 지원을 받아 전문가로부터 3개월 가량 강의를 들으며 미술을 좀 더 깊이 있게 공부하는 커뮤니티 활동을 하는 등 전문성을 향상시키는 노력도 기울이고 있습니다.

 

새로운 삶의 길은 다른 곳에서 또 열렸습니다. 이달 중순부터는 ‘중림복지관’에서 시니어를 대상으로 중국어 강의를 해달라는 의뢰를 받았습니다. 저는 퇴직 후 1년쯤부터 지역 복지관에서 중국어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시간이나 때우겠다는 심정이었으나 공부를 할수록 흥미가 났습니다. 학창시절에 한자를 일상으로 사용하던 세대에 속해서인지 중국어를 공부하며 한자의 뜻을 아주 수월하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중국어를 친숙하게 만드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주로 광화문에 있는 ‘중국문화원’ 강의에 참여하며 열심히 공부했고, 3년 정도 공부하고 보니 제 실력이 중국어 기초는 가르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자원봉사센터에 초급 중국어강사 자원봉사자로 등록해 두었습니다. 그 결과 이번에 강사의 기회를 얻게 된 것입니다.

제 중국어 공부는 아직도 진행 중입니다. 저는 이 강사활동을 제 중국어 실력의 기초를 다지는 기회로 여깁니다. 그리고 다른 분들에게 제 재능을 나누어줄 기회라고도 생각합니다. 강사로서 또 다른 삶의 보람을 얻을 수도 있으리라는 희망에 한껏 부풀어 있기도 합니다. 저는 내친김에 오는 3월 HSK 5급 시험에 응시할 계획이고, 연말경에는 최고 수준인 HSK 6급에 도전해 보려 합니다.

 

앞에 소개드린 이런 활동들은 전혀 돈벌이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야말로 순수한 자원봉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런 활동에서 정말 큰 기쁨과 보람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보상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퇴직 후 제 생활의 이런 변화는 제 생각의 변화가 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저는 퇴직 후 가장 먼저 이제 어떻게 살까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는 퇴직 전의 삶이 저와 가족에게 ‘충실한 삶’이었다면, 이제는 ‘가치 있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삶의 방향을 정리했습니다. ‘가치 있는 삶’이란 어떤 삶일까를 내쳐 생각했고 결국 남을 위한 삶이어야 한다고 구체화시켰습니다. 그래서 봉사를 시작했던 것이고 물질적인 대가를 추구하지 않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다음으로 저는 과거의 ‘훌륭한 직장인이었던 나’를 버리고 현재의 ‘수수한 백수인 나’를 새로운 나로 수용하기로 했습니다. 저는 제 나름대로 ‘백수’라는 단어의 정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정의한 ‘백수’는 ‘할 일이 없어서 빈둥대는 사람’이 아니라, ‘시간이 많아서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찾아서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 정의에 따라 저는 좋아하는 일을 찾아다녀 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쉽지 않았습니다. 어떤 일을 할 때 제가 그 일을 정말 좋아하는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할 일을 먼저 정해놓고 그 일을 그냥 열심히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그 일이 좋아졌습니다. 저는 그런 방식으로 좋아하는 일을 만들어가며 ‘새로운 나’의 백수 생활을 즐기게 되었습니다.

저는 아직도 기회가 주어진다면 직장생활을 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직장생활이 돈을 벌수 있는 수단이기도 하지만, 제가 가지고 있는 역량을 사회에 공헌하는 데 가장 잘 활용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자신 있습니다. 이제 제게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퇴직 이후 지금까지 살아 온 방법대로 앞으로도 살아간다면, 그 삶은 남에게 도움이 되고 그래서 저 자신에게도 가치가 충만한 정말로 멋진 삶일 것이라는 것에 대해서 말입니다.

 

얼마 전 아내가 제게 다시 제안했습니다. “여보, 우리 산티아고 한 번 더 가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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