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과 변화 이야기

의지와 긍정적인 마인드로 폭발한 잠재력-예다원 '김형기 대표' 수기

2014.07.29

사회연대은행이란 행운의 여신이 찾아 온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6년 전이다. 부평에서 중국 음식점을 운영했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처분하고 일용직으로 일하던 시절 우연히 한 일간지에서 사회연대은행 관련 기사를 접하게 되었다. 정상적인 은행 거래가 불가능한, 가난하고 소외된 계층의 사람들을 위해 여러 가지 활동을 하고 있다는 기사 내용에 기대와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 내용을 스크랩 해 두었다.

 

그 당시 우리 가족은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웠다. 생계를 위하여 나는 매일 다른 업소를 전전하지 않을 수 없었고 주방일, 배달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했지만 일용직의 한계를 벗어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다시 장사를 해 볼 생각으로 일을 나가면서도 수시로 시간을 내어 여러 지역을 돌며 중국음식점 자리를 물색해 보았다. 하지만 가진 것 없는 내 형편에 마땅한 곳을 찾는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기를 2년여. 보험도 모두 해지해서 생활비로 쓰기에 이르렀고 밀린 월세에 애들 교육비에 생활은 처참하리 만치 힘들어져 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애들이 비뚤어지지 않고 잘 자라 준 것이 정말 눈물겹도록 고맙다.

 

2010년 4월. 지금 영업 중인 이곳 만수동에 어렵게 나의 보금자리를 다시 꾸미게 되었다. 손볼 곳이 많았지만 보증금과 월세 모두 합쳐 일천만원이 되지 않는 저렴한 곳이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수중에 없어 아내의 카드로 카드론 대출을 받아 시작했다. 한 달, 두 달, 영업은 처음부터 순조롭지 못했다.

 

그 당시 아내가 요양보호사로 일을 하고 있던 터라 한 달간 일용직 직원을 고용해야 하는 상황이었고 채소 가격은 어찌 그리 비싼지 25년이란 세월 동안 음식점 일을 해 왔지만 이같이 폭등한 경우는 처음 겪었다. 20kg 양파 한 망에 자그마치 5만원이 넘어가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었다. 그것뿐인가. 어김없이 다가오는 카드대금이며 임대료, 관리비 그리고 차곡차곡 밀리는 가스요금에 급기야는 가스 공급을 중단하겠다는 통보도 받았다. 임대료도 저렴하고 하니 열심히만 하면 될 줄 알았는데 애초 예상과는 달리 상황은 갈수록 힘들어졌고 후회해도 이미 때는 늦었었다.

 

내가 너무 경솔했구나. 아무리 어려워도 차라리 좀 더 참고 이겨낼 걸. 그랬더라면 지금처럼 빚은 지지 않았을 걸…. 속수무책으로 무너져만 가는 현실이 너무나 참담했다. 눈물도 참 많이 흘렸다. 왜 나에게 이렇게 감당하기 힘든 시련이 찾아오는가. 직장에 잘 다니던 아내까지 그만두게 하고 시작한 이 일이 과연 옳은 판단이었나? 정말이지 아내에게 할 말이 없었다. 그래도 원망보다는 격려를 해주는 아내가 너무나 고마웠다.

 

< ‘중화요리 예다원’ 김형기 대표 부부>

 

 

아내와 둘이서 운영하던 가게에 아들이 합류하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 진학을 포기한 아들이 배달 일을 도와준 것이다. 자식을 대학에 못 보낸 부모의 심정을 무엇으로 다 표현하랴. 형편이 나아지면 아들을 꼭 대학에 보내리라 맘속으로 몇 번을 다짐했다.

 

아들의 도움으로 약간의 시간적인 여유가 생긴 나는 지난날 신문에서 보았던 사회연대은행 이란 곳을 떠올리게 되었고 그 시간 이후로 집에만 오면 사회연대은행 홈페이지를 자주 방문했다.

 그러던 중 다행스럽게 국민체육진흥공단의 ‘희망ReSTART 창업지원사업’을 접하게 되었고 떨리는 마음으로 다운받은 서류의 빈칸을 채워 나갔다. 사실 지웠다 썼다를 수십 번 반복했을 것이다. 현재의 재무 상태를 정확하게 기재하는 것이 그토록 어려울 줄 몰랐다. 하지만 혼신의 힘을 다하여 진지하게 써 내려갔다.

개인회생 절차에 따라 일정 금액을 상환 중이었던 만큼 시중 은행에서는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는 상황이었기에 보다 못한 아내가 ‘지금 상황에 사회연대은행이라고 다를 게 있겠냐’며 ‘괜한 일로 잠 못 자며 고생 하지 말라’고 만류하기도 했다. 하지만 한번 몰입이 되고나니 여기서 포기하면 안 되겠다 싶어 밤을 새워 정성스레 작성을 하고 또 했다. 꽤나 여러 장의 서류 인지라 행여 뜯어지지나 않을까 풀로 붙인 곳을 누르고 또 눌러 등기우편으로 발송을 한 후의 기다림이란 초조 그 자체였다.

 

서류심사에서 부터 실사 그리고 면접까지 통과한 후 비로소 내가 대출을 받는다는 실감을 했다. 가슴 속에선 뭉클함이 느껴졌고 눈엔 눈물이 핑 돌았다. 나도 이 사회를 위하여 언젠가는 뜻있는 일을 펼쳐 내가 받은 도움을 반드시 환원하리라 다짐했다.

 

어느덧 가을이 되어 자금이 주어졌고 어렵던 여건도 차례로 풀려갔다. 돈의 위력이 발생되는 순간들이었다. 빚이 없으니 맘이 너무나 홀가분했으며 특히나 정신적인 압박감으로 나빠졌던 건강이 조금씩 회복되고 있었다. 건강과 재물은 같이 들어오고 같이 나간다는 걸 깨달았다.

아직도 사회연대은행이 어떤 곳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은데 난 정말 행운아인 것 같다. 사회연대은행을 알게 된 것에 정말로 감사하고 행복하다.

 

희망ReSTART 자금 상환을 시작한 지 어느덧 40개월에 접어들었다. 그동안 우리 가정엔 많은 변화가 있었다. 개인회생 절차도 종료되어 신용 등급이 정상화되었고, 매일 30분가량 출퇴근 하던 집을 가게 근처 아파트로 옮겼으며 아들은 병역을 마치고 현재 대학 철도경영과에 입학해 평소에 원하던 기관사의 꿈을 키워가고 있다. 딸은 특성화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선취업 후진학을 목표로 엄마 아빠의 부담을 덜어 주겠다고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지금 자판을 누르고 있는 이 순간 회한의 눈물이 앞을 가린다.

내가 아무리 어렵고 힘들었을 지라도 나의 잠재력은 나의 건강과 경제력을 상승시킬 준비를 늘 하고 있었고 나의 의지와 긍정적인 마인드만을 기다리며 응원하고 있었다는 걸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오늘 일어난 일은 오늘의 결과물이 아니고 긍정이든 부정이든 오랜 기간 동안 행한 자신의 흔적이었다. 그래서 내일은 더 맑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글 / 김형기 대표 (희망리스타트 창업지원업체 ‘중화요리 예다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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